칼럼
돌아가고 싶은 아빠 역할 시기
안 희정
몇 년 전 강남교육청에서 아버지 100명을 대상으로 부모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밤에 하는 강의였지만 그래도 100명의 아버지가 다 오기에는 어렵겠다싶어 교육청 장학사님께 “그 바쁜 강남 아버지가 그 시간에 100명이 모일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걱정 안하셔도 되어요. 시간되면 다 오실 겁니다” 이러는 것이다. 부모교육 강의를 워낙 많이 나가보았지만 교육청 단위에서 아버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렇게 물어본 것이다. 장학사님도 “박사님께서 저희 교육청 1호 아버지 특강 강사입니다”라고 하셔서 나도 미소를 지으며 “책임이 막중하군요”라고 했다.
정말 시간이 되자 100명의 아버지들이 강당을 꽉 채웠다. 알고 보니 각 중학교에 아버지 3명을 참여하게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고 거기에 온 분들은 나름 학교에서 아이가 회장이거나 부인이 어머니회 임원을 하는 분들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오신 분도 있었고 자청해서 오신 분들도 있다고 했다.
강의를 나가기 전 날 밤 남편에게 “당신은 **이 발달단계에서 혹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아빠 역할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운 시기가 있어?”라고 물어 보았다. 남편은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없어.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아주 의기 양양하게)”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남편에게만 물어보면 신뢰도가 떨어지니까 수혜자인 딸에게도 물어 보았다. “**아, 너는 아빠가 좀 더 잘해 주었으면 하는 시기가 있었니?”라고 물어보았더니 “뭐, 글쎄.(한참을 신중하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으며) 돈을 좀 많이 못 버는 것은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아빠로서는 괜찮은 아빠야!”라고 말한다. 남편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당연한 대답이라는 듯이 “나 정도면 잘 한 아빠야!”라고 흐뭇해한다.
다행이다. 다른 아빠들에게 “아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할 시기에 그 역할을 잘 합시다”라고 강의할 것인데 안에서 바가지가 새고 있으면 밖에서 강의하기가 어려우니까. 그 날 나는 열변을 토해 강의했고 아버지들도 열심히 경청했다.
바빠서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잘 보내는 못하는 아버지들이 많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시간과 양보다는 어떤 질이냐가 중요할 것 같다. 물론 질과 양 모두 다 중요하지만 시간이 없다면 질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1주에 몇 번을 만나도 아빠가 좋다고 자녀가 말하면 아직 그 관계는 살아있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자녀가 아빠를 불편해 하고 대화를 꺼려하며 서서히 관계가 어긋나가고 있다면, '그저 나아지겠지' 하고 놔두는 것보다 무엇이 잘못 되어가고 있는가를 좀 살펴보아야 한다. 무조건 부모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만 잘못한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 전 방송에서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 사례가 나왔다. 아버지가 술도 많이 먹고 집에 와서 엄마와 매일 싸우고 엄마를 때리고 하니 아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심리검사에서도 자신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그림을 그렸고 문장완성 검사에서도 다시 동물로 태어난다면 큰 동물로 태어나 아빠를 이기겠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 아버지가 깜짝 놀랐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렇게까지 아이가 자신을 싫어하는 줄을 몰랐다고 했다.
상담을 하다보면 아버지와 관계가 나쁜 경우를 꽤 많이 보게 된다. 물론 옛날 아버지들은 더 권위적이었고 가족간의 대화를 많이 못 나눈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급급한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자.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아빠의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녀와 열심히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며 즐겁게 노는 아빠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어린자녀를 위해 휴직하는 아빠들도 많이 생긴 것을 보고 세대가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를 느낀다.
아버지들이 "나는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일 끝나고 보니 가정에는 내 자리가 없어요"라고 한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정말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의 행복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족 관계는 하루아침에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긴 세월과 시간을 두고 점차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나쁘다면 아버지와 자녀 모두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자녀가 어리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아버지가 어떻게 해 주면 내 자녀가 행복해질까? 나는 어떤 아버지 상을 꿈꾸었던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 아버지 역할도 시간이 지나 자녀가 성인이 되면 더 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까! 지금 잘하자.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